‘사단법인 희망나무’ 캄보디아 광주진료소 의료봉사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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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8-07-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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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희망나무’ 캄보디아 광주진료소 의료봉사 동행
캄보디아의 희망찬 미래, 그리 멀지 않았다
“글 읽으면 죽여라” 150만 학살 ‘킬링필드’ 딛고 재건
‘한국 의사’찾아 수십㎞ 달려온 환자들…세월호 생각도
의젓한 꼬마들의 눈에는 희망이, 청년들에겐 꿈 있었다
캄퐁스퓨 광주 진료소 의료봉사 첫날 문 밖에서 들여보내달라며 기다리는 사람들.
이미 내부도 만원인 상태였지만 바로 옆 캄퐁스퓨 보건소로 발길을 돌리는 이는 없었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래서 불쌍해. 걔 지난날을 알기가 겁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에서 감정 기복 없이 침착한, 그러나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파견 사원 이지안(아이유)을 가리켜 박동훈 부장(이선균)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러다 이지안이 떠안은 인생의 짐을 알게 된 박동훈은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냐”라며 삶의 무게를 나눠지고, 삶의 의미를 찾아 주며, 동시에 자신도 치유받는다.
살아온 궤적도 모르면서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이 ‘무례한 친절’일수도 있지만, 너무 일찍 큰 모습에 “힘내라”라고 해주고 싶은 어린 아이들을 최근에 보았다.
◇상처에 대한 두려움 참고 있는 아이들
벌써 한 달 전인 6월8일 오전 10시30분쯤 캄보디아 캄퐁스퓨 주(州)의 광주진료소.
사단법인 희망나무(이사장 서정성)의 의료봉사 마지막 날이던 이날, 진료시간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인근 300여m 떨어진 중·고등학교 ‘프뇸 스로잇’에서 남자 아이 2명 그리고 발을 천으로 감싼 여자 아이가 스쿠터를 타고 왔다.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우리네 초등학교 3~4학년쯤 돼 보이는 작고 마른 체구였다.
천을 걷어낸 아이의 작은 발에는 10㎝ 길이는 족히 될 긴 상처가 칼에 베인 듯 나 있었는데 응급처치도 받지 못한 채 흙탕물에 절어 시커맸다.
전날 학교에서 맨발로 놀다 나무뿌리에 다쳤다는데 보기만 해도 몸이 저릿한 것을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도 안 갔다.
외과 담당 조용진 조선대 정형외과 교수는 탄식을 억누르고 웃으며 “괜찮다”고 달랬다.
아이를 수술방으로 옮겨 달라기에 나도 수첩을 내려놓고 들어 안아 조심스럽게 옮겼다.
환부를 소독하고 커다란 주사로 마취를 하고 바늘로 꿰메는 동안 아이는 외마디 신음을 내거나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무표정한 채 처치를 받았지만 두려움을 참고 있다는 티가 역력했다. 아이는 통역을 맡았던 전북은행의 계열사 프놈펜상업은행(PPCB)의 직원 리다씨(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그녀는 현지 직원 중 가장 우리말에 능숙했는데 걸그룹 피에스타의 차오루만큼 잘해(라고 알려주니 좋아했다) 큰 도움을 줬다)의 팔을 꽉 쥐었는데 파르르 떨었다.
친구의 치료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던 2명의 남자아이들은 치료가 끝나자 다시 스쿠터에 친구를 태우고 학교로 돌아갔다.
순식간이었지만 우리나라의 다 큰 어른보다 더 침착한 이 아이들의 정서의 결은 과연 어떻게 형성됐을지 궁금했다. 프뇸 스로잇에서 과자와 학용품을 나눠줄 때에도 마치 “고마워. 덕분에 즐거웠어. 다음엔 내가 살께”라고 말하는 듯한 당당한 눈빛을 마주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교실이었지만, 긍지와 기개가 느껴졌다.
광주은행의 교육 봉사가 이뤄진 프뇸 스로잇 학교에서 15살 잔티어리가 난생 처음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보고 환하게 웃고 있다. “10살 때부터 물감으로 그림그리는 걸 꿈꿔왔다”는
잔티어리는 커서 기업 매니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인구 붐을 겪고 있는 캄보디아는
학생 수가 학교당 수천명에 달하지만 물감이나 교구가 갖춰진 곳이 많지 않다.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꿈이 있다
의료봉사 첫날부터 멀게는 60㎞ 밖에서 찾아온 200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뙤약볕 밑에서 기다렸다. 그들 대부분은 안과질환 외에도 관절염, 복통 등 서너개의 질환을 함께 호소했는데 의료진은 4명이었고 약도 부족했기에 곳곳에선 ‘짬!(기다려)’이라는 캄보디아말이 끊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일 부상자와 사망자가 몰려든 목포한국병원의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오버랩됐고 그때와 달리 다행히 여기서는 나도 할 일이 있었다.
약을 찾아오거나 장작으로 물을 끓이거나 환자를 옮기거나 하는 것을 도왔다.
광주 진료소 바로 옆이 캄퐁스퓨 주의 보건소였지만 한산했고 병상도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채 방치될 만큼 현지 의료는 열악했다.
1975년 정권을 잡은 폴포트의 크메르 루즈 공산 정권은 피의 숙청을 벌여 4년 만에 150만 명을 학살했는데, 특히 지식인과 기술자들이 대거 희생됐고 90년대 초까지 내전이 계속됐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700~800만인만큼 나라가 결단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의사 육성이 다시 시작된 것도 90년대 중반부터이며 전문 의료인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만큼 캄보디아도 인류사에 다시없을 참극을 딛고 번영을 누리길 희망했다.
의료봉사 마지막 날, 수도 프놈펜은 여느 대도시와 다를 바 없는 휘황찬란한 네온야경을 뿜어냈고 이를 보며 20대의 PPCB 직원 우돔씨에게 꿈을 물었다.
“당신은 큰 은행 직원이고 나라의 인재라 하겠소. 장차 조국의 어떤 발전상을 꿈꾸시오. 혹시 게임은 하시오?”
“어벤져스3가 국내에서 생각외로 부진을 면치 못해 안타깝소. 향후 돈 많이 벌면 문화콘텐츠산업을 펼쳐보고 싶소이다. 혹시 배틀그라운드(한국 업체가 만든 전세계급 총게임) 하시오? 내 아이디가 뭐냐면…”
우려와는 달리 캄보디아의 아이들과 청년들이 멋진 미래를 펼쳐 갈 것이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글·사진=서충섭 무등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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