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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 조광흠(전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연합통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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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4-12-09 14:55
  • 조회수 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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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 무등산 개방 때 지왕봉 아래서 폼을 잡았다.

최근 허리수술후 재활중이어서 등산을 쉬고 있다.
2. 조선일보 광주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필자.
3. 86년 전석홍 지사 방미 수행단과 기념촬영.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조광흠(전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연합통신 기자)

 

조광흠 본부장은

한국일보 광주·여수 주재기자
조선일보 광주 주재기자
연합통신 기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차장
조선일보 호남취재본부장

 


곁눈질과 헛발질로 시작한 기자생활 30년

 

 1974년 1월 3일 신년 시무식은 숙명의 시작이었다. 한국일보 견습기자 공채 29기로 뽑혀 29명의 동기들과 함께 서울 안국동 본사에서 수습에 들어갔다. 곁눈질과 헛발질로 기자질을 익히고, 3개월만에 광주에 부임했다. 때는 기본적인 기자직 수행보다 직전 발령된 긴급조치 9호에 따른 취재 보도 요령과 주의점 숙지가 더 급했던 시절이었다.  이상문, 박희서, 이준박 선배 밑에서 기사를 익혔다.


 75년 기자로서 안목을 넓히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여수에 부임해 홀로서기를 하던 중 큰 사건을 만난 것이다. 다름아닌 여수 밀수 폭력사건. 대검 특수부 김병리 과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팀이 여수에 들어와 수사에 나선 것. 운좋게 낌새를 알아채고 본사에 알린 것이 1면톱 대특종으로 이어졌다. 1개월 이상을 현지에 체류하며 허봉용 등 3개파 밀수조직과 경찰서장, 정보부 출장소장 등 비호세력들을 줄줄이 구속한 지역 초미의 사건이었다. 1보가 나간 날 정보부 출장소에 임의동행돼 진술서를 강요받았다. 도중 모처에서 걸려온 전화 덕에 바로 풀려났다. 대통령 특명 수사이니 기자를 건드리지 말라는 전갈이었다. 얼마후 진술서를 강요한 출장소장은 이 사건과 연루돼 구속됐다.

 

무등산 입석·서석대 시민 품으로

 

 이 사건 취재가 계기가 돼 다른 생을 살게 된다. 조선일보 최계원 지사장과 박래명 선배의 부름을 받았다. 


 마침 조선일보 광주지사에서 기자 한명을 모집 중이니 올 수 있냐는 것이었다. 객지 생활도 그렇고 자칫 조두흠(당시 한국일보 주일특파원) 형님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까하는 기우, 홀로 커보고 싶은 자부심 등이 복합 작용해 결심을 굳혔다. 사표 제출 후 장기영 사장께서 직접 전화해 만류했고, 형님까지 국제전화를 주셨으나 고집을 꺽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일보 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내 인생의 피와 살이 되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모먼트가 된 것. 조선일보는 그무렵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 일등신문이 되었고, 처우도 크게 개선됐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굳어가는 즈음 기자로서,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절대 잊을 수 없는 5.18을 맞았다. 일반 통신수단이 절단된 상태에서 경찰국장 관사 등지에서의 경비전화를 이용해 서울시경 캡에게 실시간 상황을 알렸고, 인맥을 활용, 전화국내 설치된 청와대 직통회로를 이용해 본사와 통화를 계속했다. 당시 사정으로 보도는 안됐어도 광주의 비상상황을 데스크에 알린 공으로 기자생활 2번째의 1급 특종상을 수상했다.


 외견상 평온을 찾아가는 시내 표정과는 달리 언론계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른바 언론 통폐합. 중암지 주재기자제는 폐지되고, 지방사는 1도 1사, 방송사는 KBS로 통합 등등. 자고 나면 파리 목숨처럼 해직을 당하는 선배들. 


 이런 과정에 기존 합동, 동양통신을 통합해 발족한 연합통신만이 지방기자를 둘 수 있게 했다.


 중앙지 중에서 선택(?)된 기자들로 연합통신 광주지사가 발족했다. 편치않은 마음으로 전직을 했다. 민주화 바람이 일기까지 7년여 세월을 전일빌딩 9층 연통 사옥에서 그렇게 보냈다. 연합통신에서의 보람은 김성진 사장이 수여한 최다 전재상을 고급만년필과 함께 수상한 일이다. 이때 술 잘 마시며 입담도 걸다해 ‘조포’라는 애칭을 얻었다.

 

술 잘 마시며 입담 걸다해 '조포' 애칭


 87년 언론계에도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강제 통폐합 이전으로 원상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다. 나도 친정 조선일보의 부름을 받았다. 연통에 갔다 복귀한 4명의 동료들을 ‘돌아온 4총사’란 애칭으로 회사는 따뜻이 맞아줬다. 


 홀로 주재하며 광주와 전남·북까지 커버하는 힘에 부친 생활이었지만 맘만은 편했다. 군사기밀보호법이 느슨해진 때에 맞춰 무등산 입석·서석대를 시민품에 돌려달라는 첫 보도는 지금도 흐뭇하다.


 88년 도지사 공관 지방청와대 집기 은폐사건은 생애 3번째 큰 특종. 문창수 전남지사가 지방 대통령 전용시설에 대한 국회 초유의 국정조사팀의 방문 전날 밤 공관내 호화집기를 은폐시킨 사건으로 결국 지사가 낙마한 사건이었다. 


 사실을 그대로 밝혔으면 퇴임까지는 안 갈 사건이었는데 말바꾸기를 계속해 여론의 질타를 피해 가지 못한 것 같다.


 이 때쯤 컴퓨터 붐과 함께 신문 제작환경에도 큰 바람이 불어왔다. 조선일보는 CTS(컴퓨터제작시스템) 체제로 전환, 각 기자에게 노트북과 함께 디지털카메라, 휴대폰 등을 지급했다. 더불어 지방 취재망을 대폭 보강, 2~3개 시도를 커버하는 지방취재본부를 가동했다. 언론사상 중앙지로서는 처음으로 발족한 호남취재본부는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며 후배들이 열심히 뛰고 있어 흐뭇하다. 적은 인원으로 매일 10단 1개면과 매주 지방색션을 발행하는 격무였다. 6~7명이 취재하고 쓰는 일 외에 편집 조판까지를 현지에서 해냈다. 취재본부 선임기자에서 차장, 본부장까지 역임하며 기자생활의 꽃을 피웠다. 지방기자로서 접해 보기 힘들던 편집에 대한 외경심도 접을 수 있었고, 지면을 의지대로 꾸려보는 재미는 옛날 기자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맛이 있었다. 만 30년 기자생활을 마감하고 정년을 앞둔 2003년 회사는 뒷자리로 호남광고지사장직을 맡겨줘 8년여 언론계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다. 


 날로 척박해지는 언론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배들 앞에 혼자 행운을 누리고 잘 난 척한 것 같아 송구스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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