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기자 제주 세미나-그날은 광주도 섬이었다. 또 다른 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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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20-12-0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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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기자 제주 세미나
그날은 광주도 섬이었다. 또 다른 제주였다
1년~6년차 22명의 나흘간 여정
같은 상처·과제 안은 5·18과 4·3
국가폭력 피해 관심 갖는 계기
<사진설명> 광주전남사건세미나에 참석한 사건팀 기자들이 지난 19일 제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교육센터에서 양조훈 4·3재단 이사장의 강연과 전시 관람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첫날부터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더니 비행기는 지연됐고 30분 동안 쉴 새 없이 널뛰는 비행기 안에서 서로의 생사를 걱정하며 고단한 일정을 시작했다. ‘여기서 죽으면 산재겠지’라는 생각이 들 때쯤 모습을 드러낸 제주는 11월 말에 영상 22도라는 후텁지근한 날씨로 우리를 맞았다. 지난 19일부터 2박3일간 진행한 광주전남기자협회 사건기자 세미나. 광주전남에서 활동하는 협회 소속 사건팀 1년차부터 6년차까지 기자 22명이 여정을 함께 했다.
‘국가폭력과 국가차원의 과거사 정리, 그리고 치유’를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는 5·18과 함께 또 다른 저항과 아픔의 역사로 꼽히는 제주4·3을 제대로 알고 치유의 방법을 모색하자는 의미에서 마련됐다.
제주 일정은 꽤 타이트했다. 첫날은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양조훈 제주4·3재단 이사장의 강연을 듣고 전시 투어를 진행했는데 꿉꿉한 날씨에 땀을 뻘뻘 흘려야했다. 둘째 날은 몰아치는 파도와 칼바람에 시린 눈물을 쏙 뺐다. 마지막 날은 북촌리 주민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 북촌리 일대 해안가를 하염없이 걸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54년 9월21일까지 7년6개월여 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 또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마지막 날 찾은 북촌리는 제주 4·3의 피해가 가장 컸던 지역 중 한 곳으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살을 겪으며 마을에 남자가 없어 ‘무남촌’(無男村)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 주민 400여명이 집단 총살을 당하고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됐으나 어린 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남아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말없이 북촌리 앞부터 함덕해변을 따라 걸을 때는 마냥 푸를 것만 같은 제주도 바다가 서글퍼보였다. 하지만 마냥 들 뜬 마음으로 제주를 마주하는 것보다 조금은 지치고 어둑한 바다를 보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 낀 4·3평화공원 앞의 까마귀 떼와 북촌너븐숭이기념관 앞 새까만 현무암의 애기무덤에 놓인 꼬까신을 보면 ‘푸른 제주’보다 ‘검은 제주’가 퍽 어울렸기 때문이다.
제주4·3의 행적을 따라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다크 투어’ 일정을 마치고 미처 몰랐던 제주4·3과 마주한 후 육지로 돌아왔다. 하지만 난 아직 섬이다. 바다를 건넜으나 육지 안에 고립된 섬은 저 바다 건너 제주도와 다를 바 없다.
1948년 제주 4·3과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닮았다. 유일한 보이콧을 자처하며 계엄령이 선포돼 고립된 지역. 봉쇄 후 대학살이 일어난 아픔의 장소. 그리고 언론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던 고립무원의 섬. ‘보이콧→계엄령→학살’ 그 아픔의 굴레는 32년을 돌아 다시 반복됐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며 유일한 보이콧을 한 섬. 제주는 미군정의 분개를 불러 일명 ‘청소작전’의 대상이 됐다. 해안선 5km이외 모든 지역이 불살라지고 생명체가 죽임을 당해 3만여명의 제주도민이 이유도 없이 이념이라는 총칼에 쓰러져갔다.
32년 후 광주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서울역회군’을 보이콧하고 가두시위를 벌인 광주에는 계엄령이 선포됐고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40년이 지난 2020년에도 또 다른 아픔의 굴레가 반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은 4·3에 그저 침묵했고 5·18 당시에는 광주mbc가 불타는 걸 목도해야 했다.
기자의 질문에 입을 꼭 다문 제주 할멍들도 5·18 청문회를 보며 “4·3은 더 지독했다”며 입을 열었다고 한다. 닫힌 할멍들의 입을 열게 하고 진실을 파헤친 건 기자의 물음이었다. 그날의 침묵을 사죄하듯 묻고 또 묻는 게 오늘을 사는 기자들의 몫이 아닐까.
/ 허단비 뉴스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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