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정 철 호남대 홍보실장(전 광남일보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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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4-06-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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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호남대 통합뉴스센터 학생기자들과 함께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전을 찾아 현장학습을 하고 있다.
정 철 홍보실장은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전남대대학원 문화재학과 졸
1989년 전남매일 기자 입사
전남매일 사회부장·정치부장
광남일보 논설위원·부국장·전략기획실장
호남대학교 홍보실장
한국대학홍보협의회(KUPA) 회장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정 철 호남대 홍보실장
전 광남일보 전략기획실장
나는 ‘행복한 기자’였다
20여 년 동안 기자로 불렸던 때가 있었다. 그중 대부분을 사회부 기자로 살았으니 ‘기자팔자’로는 조금은 고단한 셈이었던 것 같다. 1989년 광주서부서 ‘사스마리’로 시작된 기자의 길은 ‘직업’(일) 이상의 ‘즐거움’이었다. 기자실에서 며칠씩 새우잠을 자도, 취재차를 배정받지 못해 버스와 배를 번갈아 타고 낙도에 가, 풍랑에 발이 묶이는 ‘개고생’을 해도 기자라는 것이 마냥 즐거웠으니 천상 ‘기자’였던 모양이다.
‘사건 캡’을 맡았던 1993년은 유난히 대형사고가 많았다. 문민정권 출범7개월 뒤인 9월26일, 목포로 가던 아시아나항공기가 해남 화원 마천리 야산에 추락해 66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은 큰아이(별)이가 10살이 넘도록 동생을 못 봐, 둘째를 얻기 위해 불임클리닉에 거금을 투자해, ‘운기조식’을 거쳐 ‘거사’를 치러야하는 날이었다. 후배들과 사고현장으로 내달렸고, 한동안 나를 애타게 찾던 ‘마눌님’의 삐삐는 며칠 동안 울리지 않았다.
2주 뒤인 10월10일, 전북 부안 위도 앞 바다에서 서해페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익사하는 대형 참사가 또 터졌다. 지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고와 너무도 흡사한 이 사고 역시,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초래한 인재였다. 이날 역시, 단골 불임크리닉 원장이 ‘거사’ 일로 잡아 준 날이었다. 이후 우리 부부는 둘째를 포기했었다.
실존인물 홍길동·심청을 만나다
기자 생활 중 최고의 보람은 ‘홍길동’과 ‘심청’, 그리고 ‘영산강’과의 만남이었다. 기자 9년차이던 1997년 4월, 소설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었던 ‘의적 홍길동’이 ‘장성 출신 실존인물’이라는 첩보가 있었다. 당시 사회부장이던 나는, 매주 토요일 사회면에 보도되던 ‘주말화제’꺼리를 찾아 장성으로 향했고, 홍길동의 출생지로 구전돼오던 황룡면 아치실에서 기자 특유의 후각으로 ‘실존인물 홍길동’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영화처럼 ‘실존인물 홍길동’을 쫓던 연세대 양권승 박사팀을 만나 ‘언·학 연구취재팀’을 꾸렸다. 며칠 후 4월19일자 ‘주말화제’는 ‘홍길동은 장성출신 실존인물’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그것도 1면에.
족보학을 전공한 양 박사의 족보와 각종사료를 접목한 추적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4~5개월 만에 국내에서의 홍길동의 전 생애를 재구성한 취재팀은 ‘다시쓰는 실록 홍길동전’이라는 특별기획시리즈를 연재(18회)했다.
남은 숙제는 ‘홍길동전’ 종반부에 나오는 율도국을 찾는 일이었지만, 뜻밖의 원군이 나타났다. 한국에 파견 나와 있던 오키나와관광청 서울사무소장이 내가 쓴 기사에 실린 홍길동성(공주 무성산) 사진을 오키나와 류큐대학 등으로 보냈더니, “류큐 역사에 1500년경 바다를 건너와 류큐열도를 지배한 홍가와라(洪家王, 홍씨 성을 가진 왕)라는 인물이 쌓은 성과 모양이 너무 흡사하다는 회신이 왔다”는 연락을 해왔다.
우리 팀은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다. 문제는 취재 경비였다. 일반 여행비용보다 세배정도 더 드는 취재예산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마눌님’의 카드를 ‘활용’하기로 했다. ‘윤허’받지 않은 카드로 속칭 ‘깡’을 통해 취재비를 마련한 나와 이승준 사진기자, 양 박사 등은 오키나와를 거처 류큐열도를 샅샅이 뒤지며 홍길동과 율도국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류큐인들에게 ‘홍가와라’는 만민평등을 실현한 ‘민중의 제왕’으로 추앙 받고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년 ‘홍가와라 마쯔리(축제)’를 열어 그를 기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1998년 5월 1일, 1년 여 동안 보도한 내용을 엮은 단행본 ‘실존인물 홍길동’(중앙M&B) 출판했다.
장성군은 이 같은 취재보도를 바탕으로 1999년부터 매년 ‘홍길동축제’를 개최해, 전남의 대표적인 축제로 발전시켰다.
그해 곡성 관음사 사적기 연기설화를 근거로 한 ‘실존효녀 심청 프로젝트’가 시작될 무렵, 11년을 고대하던 둘째(딸기)가 태어났다. 그것도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의 창간 10주년기념일 아침에… .
‘실존효녀 심청연구’ 역시 양 박사팀과 호흡하며 잘 마무리돼, 곡성군이 2001년부터 ‘심청축제’를 열어 한국을 대표하는 ‘효 문화제’로 주목받고 있으니 뿌듯하고 고마울 뿐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살리기’ 선구자
나에게 영산강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같은 곳이다. 풍요의 상징인 ‘남도의 젖줄’이자 역사 문화의 보고인 영산강은, 70년대 후반 하구둑 축조로 물길이 끊겨 강물이 썩어가고 유역권 경제도 죽어가기 시작했다.
1997년 ‘영산강뱃길복원 프로젝트’를 기획, 10여 년 동안 수차례 특집보도를 통해 뱃길복원을 통한 영산강살리기와 유역권 문화관광개발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또 민·언·관협의체를 만들어 매년 뱃길탐사, 뱃길사진전, 포럼, 걷기대회, 마라톤대회 등을 개최하고, 영산강에 거북선을 띄워 영산강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구했다.
그 결과 2005년, ‘영산강 뱃길복원’을 통한 ‘영산강살리기’를 광주시와 전라남도의 상생프로젝트로 완성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통합뉴스센터 구축·멀티언론인 양성
평생 기자이고 싶었건만, 2008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대학에서 하는 일 역시, ‘홍보실장 겸 통합뉴스센터 주간’인지라 여전히 기자(짝퉁)처럼 살고 있다.
특히 현역 기자시절부터 꼭 실현해보고 싶었던 ‘통합뉴스센터’는 ‘원 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에 기반한 미래형 미디어시스템으로, 기존의 3개 학내 미디어매체들을 하나로 통합해 취재의 효율을 극대화한 시스템이다. 학생기자 모두는 기자, PD, 아나운서, 촬영 편집 등의 실무를 배우고 익혀 ‘멀티플레이어’로 거듭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결코 순탄치 많은 않았던 기자 시절 고비 고비를, 나는 일에 몰두하고, 일을 찾아 즐기며 홀로 행복했었던 것 같다. 가족들은 많이 힘들었겠지만…. 나보다도 더 ‘행복한 후배기자’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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