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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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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3-03-19 16:47
  • 조회수 6,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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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돌아본 기자생활

 40년 기자생활을 돌아보며

 나경택 전 연합뉴스 광주전남지사장

 



후배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기자협회보에 싣겠다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기자생활을 돌아보는 글을 부탁한다고 했다. 무조건 '오케이'란 답을 보내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말이다.



40년의 기자생활을 마무리하고 광주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2년 이상 구당 선생의 뜸과 침을 공부했다. 침뜸요법사 시험도 합격했다.



그러다 3년 전인 20102월에, 4월 개원하는 빛고을노인복지재단 효령노인복지타운에서 일하게 됐다. 그 해 6월에는 빛고을노인건강타운으로 자리를 옮겨와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 곳은 광주지역 60세 이상 인구 208000여 명의 26%54000여 명이 회원으로 등록해 이용하는 곳이다.



최근의 설문 조사 결과 이곳을 이용하는 83%의 어르신들이 자신이 더 젊어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만큼 어르신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곳이 바로 빛고을 노인건강타운이다.



이곳에서 기자 시절 익힌 기술과 예절 등으로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사진기자로 활동하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때가 많다. 은퇴 후 제2의 삶을 사시는 어르신들과 나 자신을 보면 세월이 너무나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의 증인으로, 사진기자로 보낸 40


196726일 당시 전남매일신문사 사진기자로 입사해 2007228일 연합뉴스 광주전남지사장을 마지막으로 40년 동안 문자 그대로 물불 가림 없이 현장을 지켜온 세월이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



격동기였던 한국 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역사의 증언자로 40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고 보람이었다.



1960년대 막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우리나라는 70년대 들어 산업화라는 명제 아래 사회가 재편되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모두들 도시로 향하면서 농촌의 변모가 급격했고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 요구도 급물살을 탔다. 그 와중에서 19805, 잊을 수 없는 518광주민중항쟁이 발발, 긴 사진기자 생활에서 가장 아프고 쓰라린 그리고 절절한 취재 기록을 남기게 됐다.



1980년 당시의 광주는 강제로 지워진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광주전남지역을 담당하는 사진기자로서 광주의 아픔을 기록했고, 광주의 이름으로 진행된 우리 시대의 민주화과정을 지켜봤다. 518항쟁기간동안 성당 등에서 잠을 자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건물에 숨어 한 컷 한 컷을 기록해나갔다. 당시에 광주지역 신문사 2곳은 문을 닫아야 했으며 많은 기자들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지금 당장 보도하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는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물불 가리지 않고 기록해가며 외신에 제공해 마침내 외국에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게 됐다.



이같이 기록한 사진물이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데 한몫을 했으며, 1990년대 들어 당시의 기록들이 공개되고 재평가되면서 광주가 '부활'하는 역사의 질곡을 건너왔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기록한 518항쟁 필름 등이 2년 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드디어 805월 당시 '폭도'로 불렸던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이 세계가 인정하는 '민중항쟁'으로 공인받게 된 것이다.



사진은 그 때 그 현장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사실성과 역사성을 높이 평가받는다.



사진기자는 펜 대신 카메라로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사관(史官)인 셈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했고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 애써왔다고 자부한다.



오랜 기자 생활에 여러 번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1990년에 수상한 '용기 있는 기자상'이었다. 518광주민중항쟁 제10주년 기념 미사때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로부터 받은 상이다. 1987년 전두환 정부때 광주항쟁이라는 말조차 금기시되던 공포의 시절, 정평위가 제공자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광주항쟁 당시 사진을 기습적으로 사진집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란 책으로 발간하고 전시회도 열었는데 그때 내가 촬영한 많은 사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당시에 광주항쟁 사진을 내어놓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용기 있는 기자상'을 받은 그 해에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한 '한국기자상(사진보도 부문)' 또한 큰 영광이었다. 이 상은 89년도에 광주전남지역을 강타한 수재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해 전국 각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는 공로로 받았다.



1981년부터는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몸 담아 일해 왔기 때문에 광주전남지역에서 본인이 취재하는 뉴스는 전국의 각 일간지에 배포되던 시절, 하루 400가 쏟아지는 집중호우로 접근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목숨 걸고 취재한 덕분이었다.



이러한 것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일보다 스스로에게 좀 더 대견한 것은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 오직 그것에만 매진했다는 점이다.



지나간 순간은 다시 불러올 수 없다. 사진기자가 꼭 그 때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다. 사건사고가 예고를 해주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는 촉각이 예민해야 하고 판단력은 정확해야 하며 행동 또한 민첩해야 중요한 현장을 놓치지 않는다.



언론계 대선배인 송건호 선생은 "기자는 냉철한 이마와 따뜻한 가슴을 동시에 갖고 있어야 한다"고 후배기자들에게 틈 있을 때마다 말하곤 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차가울 정도로 이성적 판단을 지키되, 가슴 깊이 간직해야 '기자다운 기자'가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거미도 거미줄을 쳐야 먹잇감을 구한다고 했다. 항상 현장을 지키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후배기자들이 될 것을 당부한다. 이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하는 사람 등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중국 속담에 '기러기는 날아가면서 울음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좋은 명성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속담이다. 신문 기사와 사진 설명에는 기자의 이름이 붙는다. 기자는 힘들긴 해도 좋은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 있다.



우리 지역민들이 더욱 편하고 바르며 즐거운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기자들이 되기를 바라며, 하느님의 은총 속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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