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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고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이창수 곡성군청 기획홍보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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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15-06-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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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1993년, 초모랑마 베이스캠프 가는 길

 

 

[되돌아 본 나의 기자생활]

이창수 곡성군청 기획홍보단장, 전 광주일보 논설위원

 

 

이창수 단장은

1982년 광주일보 1기 입사

광주일보 정치·경제·사회·문화부장, 뉴미디어 부장

광주일보 논설위원·문화사업국장

곡성군청 기획홍보단장

 

 

광주전남 언론인 산으로 이끈 선구자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서평(書評)’ 한 대목.
“한 대(代)가 업(業)을 지으면 기자를 하고, 2대가 업을 지어 홍보(弘報)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엮은 리얼 스토리라 했다. 그날, 저녁 자리에서 후배에게 던진 한마디. “그래. 3대의 업이 쌓이면 기자 하다가 홍보를 하는 건가? 그게 바로 나지


흔한 얘기로 우리가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시간 속에 자신의 생을 사는 의미를 새겨 넣는 행위다. 공인이기도 한 기자는 특히 그렇다.


얼마 전 받은 전화 한 통. 취기가 덜 가신 상태에서 오랜만에 듣게 된 “선배님”이라는 친숙한(?) 호칭이 이 글을 쓰게 한 동인이자 족쇄였다.


고향 집으로 귀촌한 지 어느새 10년 여, ‘정부 미(米)’에 입맛이 길들여진 상태에서 ’나의 기자시절‘ 운운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후배‘에게 엉겁결에 답한 것일지라도 엄연한 약속, 그래서 앞으로 취중 통화는 안 하는 게 상책일 터.

 

'광주일보 1기' 부푼  꿈이자 버거운 짐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듯 지나온 시간들의 아릿한 편린들을 추슬러 본다. 스스로 깨뜨린 유리 병 조각에 손목을 베인 것처럼 아리지만 슬프지는 않다. 기자(記者), 그 때의 상념은 아직도 마저 끝나지 않은 ‘5월’로 시작된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년의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격동의 80년대 초, 광주일보에 입사한 내게 금아(琴兒)의 수필처럼 찬란했던 ‘5월’은 늘 매캐한 최루가스에 덮여 변주되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시대의 성장통으로 다가오곤 했다.


익히 아다시피 광주일보는 민족 전란인 6·25를 겪으며 태동한 ‘전남일보’와 4·19혁명의 씨앗을 품고 싹을 튼 ‘전남매일신문’(최승호 선배님의 ‘광주일보가 나아갈 길’에서 인용)이 신 군부의 체외 수정으로 새롭게 태어난 광주·전남지역 유일의 종합 일간지였다. 


그래서 광주일보는 저항과 혁신, 보수와 개혁의 DNA를 공유할 수밖에 없었고, 광주일보의 한 아이콘이기도 했던 ‘수습기자 1기’라는 이름표는 내게 늘 부푼 꿈과 함께 버거운 짐도 마다하지 못하게 하는 주술이었다. 


소위 중앙 일간지와 ‘1도(道)1사(社)’ 체제의 지방신문은 물론 방송 3사에 입사한 대한민국의 모든 수습기자들이 ‘5공’ 정부가 주관한 집체교육을 받고, 세칭 ‘기자증(press card)’을 받아 언론의 길에 들어서던 때였다.


1987년 7월, ‘6·29선언’에 따른 ‘6공’ 탄생 과정에서 대통령 후보 인터뷰 일정은 ‘이한열 사망’ 사건으로 연세대 현장 취재로 바뀌었고, 89년 ‘이철규 변사사건’은 ‘부패망(腐敗網)’ 등 새삼스러운 법의학 공부와  현장 재연 등 기자와 스페셜리스트를 넘나드는 곡예까지 마다하지 않게 했었다. 그 때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후배님들께 귀한 지면을 빌려 선임으로서의 독선과 아집을 사과드린다.  

 

에베레스트 등 대자연의 은밀한 오지 탐닉

 

80년대 어스름, ‘89~90 에베레스트 원정대’라는 나를 미치게 만든 속칭 ‘뽕’을 맞게 된다. 서울과 경남·북에 이어 광주·전남 산악인들이 히말라야 원정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억대’를 넘는 비용 부담으로 감히 넘보지 못했던 ‘하얀 산’을 향해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이 도전의 깃발을 내걸었고, 한국일보의 대한산악연맹 한국 에베레스트원정대 동행취재가 유일무이였던 언론 환경에서 호승심을 주체하지  못한 내게 ‘제3의 극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은 공모 형태(편집부국장께서 젊은 기자 3~4명에게 동행취재를 암시하며 각자 준비와 훈련을 권유)로 원정팀에 선발된 이후 네팔 에베레스트와 중국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중국 명칭), 천산산맥 칸텡그리·포베다 원정, 캄차카 화산지대 탐사 등 한동안 대자연의 은밀한 오지(奧地)를 탐닉하는 열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내게 또 하나의 여정(旅程)이었다. 80년대가 기자로서 인문학·사람과의 대화 노력이었다면 90년대는 생태학·자연과의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사람 앞에 선 기자’와 ‘자연 앞에 선 기자’의 차이, 그리고 자신의 어설픈 민낯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리라.


2004년이 저물 무렵. ‘언론사도 기업’이라는 경영자의 트랙을 벗어나지 못해 ‘백척간두 진일보’라며 행한 귀향. 그리고  군정 홍보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언론과의 교감이 시작됐다. 


일전, 매일 아침 뒤적이는 신문들 가운데 지령 20000호 광주일보를 대면했다. 특집을 엮어 낸 선·후배님들의 표정을 행간으로 읽으며, 버릇처럼 지인과의 ’쏘맥 한잔’을 예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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