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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6> 아에프페 통신(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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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25-01-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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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6> 아에프페 통신(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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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통신사의 시작과 현재

 

19세기, 외신 번역 사무소로 출발

1944년 파리 해방과 함께 국영화

13년 후 국영 탈피편집권 독립

이사회, 지역신문 3곳 포함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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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패색이 이미 짙어졌지만 아직은 도시가 해방되기 전인 1944820일의 파리. 일요일이던 이날 아침 7시에 긴장한 표정을 한 여덟 명의 남성들이 나치 본부가 있던 오페라 하우스 인근 부르스 광장에 모였다. 이들의 목표는 원래 아바스(Havas) 통신사의 건물이었으나 4년 전부터 프랑스 정보국(OFI)이 사용 중인 13번지였다. 비시 정부가 설립한 정보국은 나치 선전기관으로 전락해 있었다.

파리 해방을 앞두고 공산당 지도자 앙리 롤-탕기는 총동원령을 내린 상태였다. 파리 해방위원회에서 파견된 무장한 2명의 특공대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던 8명의 레지스탕스 언론인과 합류해 건물 내 정보국의 편집국에 돌진했다. 특공대는 독일군 검열관을 지하실에 감금했고, 함께 도착한 언론인들은 근무 중이던 편집국 내 십여명의 기자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말고 떠나지도 마시오. 이제 당신들은 독일이 아닌 프랑스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오.”

대부분 전직 아바스 통신사 기자들이던 이들은 이날 오전 1130분 역사적인 아에프페(AFP)통신발() 1신을 전송했다. “프랑스 내무군 덕에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 거의 해방된 파리에서 자유 언론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아에프페가 첫 서비스를 시작한다누런 종이에 복사된 1신은 자전거를 탄 연락관에 의해 지하 신문과 레지스탕스 본부에 전달됐다.

로이터, AP 통신과 함께 세계 3대 통신사로 꼽히는 아에프페는 이렇게 탄생했다. 언론사에 있어 통신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기자수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역 언론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사실은 프랑스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전보 시스템이 다른 지역보다 일찍 도입된 보르도에 지역 첫 일간지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리에서 생산되는 뉴스를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에프페의 전신인 아바스 통신사는 1835년 설립됐다. 식민지 무역업을 하며 은행가로도 활동했던 샤를-루이 아바스(Charles-Louis Havas)는 한때 잘나가던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1825년 런던발 주가폭락을 계기로 빚더미에 앉게 됐다. 함께 식민지 무역업을 하던 이전 동료의 도움을 받은 아바스는 1832년 전에 없던, 독특한 개념의 사무실을 하나 차렸다. 이름하여, ‘외신 번역 사무소’.

당시 대항해 시대의 막바지에 이르러 서양 열강은 식민지 전쟁으로 더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정세가 경제에 직접적 타격을 준다는 사실이 1825년 런던 사태로 증명이 된 상태였다.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얻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바스가 차린 새 사업의 목적은 각국에서 취합한 뉴스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알리는 것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뉴스에 접근하기 위해 사무소의 위치도 파리 시내의 중앙우체국 앞으로 정했다. 아바스는 영어와 독일어 뉴스를, 리스본 태생인 부인은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 뉴스를 번역했다.

각종 언론에 직접 글을 쓰기도 했던 아바스는 독일의 언론을 사들이고 기자 네트워크를 통신사 업무에 본격 적용했다. 현대적 의미의 국제뉴스 통신사의 시초였다. 사세가 확장하자 프랑스 국내 언론을 병합하고 유럽의 각국으로부터 젊은 기자들을 새롭게 채용하는가 하면 프랑스 정부의 보조금을 받기에 이른다. 정부도 해외 뉴스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독점적 통신사를 가진데다 여러 언론을 거느린 아바스는 프랑스 언론계의 큰손이 됐다. 1840년 루이 필립 1세가 공화정을 뒤엎고 7월 왕정복고에 성공한 뒤 대부분의 언론이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아바스는 지식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대문호 발자크는 대중들은 여러 신문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하나 뿐이다. 그건 아바스다라고 지적했다.

독일 지역에서 아바스가 영입한 기자 중에는 지금의 우리도 익히 아는 이름이 있다. 폴 로이터는 나중에 런던으로 건너가 아바스 통신을 모델로 영어권 통신사를 차린다. 1851년 로이터 통신의 시작이었다. 아바스 통신의 영광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고 일부 경영인들이 나치 정권에 협력해 부역자로 규정되면서 그 빛을 다하게 됐다.

아에프페 통신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 다른 모든 사안을 제치고 처음으로 샤를 드골이 발표한 일련의 언론개혁 훈령에 그 존재가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1944930일 훈령은 비시 정권의 독일 선전도구로 활용됐던 정보국은 아에프페가 대체한다고 명시했다. 이 훈령에 따라 정보국이 점령했던 아바스 통신사의 건물 등도 아에프페 소유로 넘어갔다. 한동안 국영 통신사 지위를 유지한 아에프페는 숙명적으로 독립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로이터 통신의 경우 이미 1925년 지역 신문들이 주축을 이룬 영국언론협회가 대주주로 등장하면서 독립성 문제를 해결했다. 아에프페는 로이터의 사례를 따르려고 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통신사가 설립된 뒤 13년이 지나서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국회는 1957110일 아에프페의 법적 지위가 규정된 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새 법에 따르면 아에프페는 더 이상 국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민영화된 것도 아닌 독특한 지위로 바뀌었다. 편집권의 독립과 재정적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19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설립해 운영하게 됐다. 이사회에는 신문협회 5, 정부 추천인사 3, 기자 2인을 포함한 직원 3인 등이 포함돼 독립성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견제 장치가 마련됐다. “자유 언론을 위해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아에프페 1신의 정신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아에프페 운영에 지역 언론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반영된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점이다. 신문협회 몫 5인 중 적어도 셋은 지역에 할당됐다. 현재 이사 중에는 클레르몽-페랑에 본사를 둔 중남부 지역 일간지 <라몽타뉴>의 대표,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서부 기반의 지역지 <우에스트 프랑스>의 편집장, 툴루즈에 본사를 둔 남서부 지역 일간지 <라데페슈뒤미디>의 대표 등이 지역 언론을 대표하고, <르몽드><르파리지앵> 대표가 각각 전국지를 대표하고 있다.

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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