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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3> 르파리지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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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광주전남기자협회
  • 작성일 24-07-25 16:00
  • 조회수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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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많았던 파리 유일 지역지, 럭셔리 자본으로 기사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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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지역언론을 보다
<3> 르파리지앵

 

논쟁의 중심경영자 아모리 사망에 사세 위축

2015LVMH 인수 이후 미디어그룹으로 성장

수도권 9곳 특별판 발행파리 안팎 소식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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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전체 신문 중 부동의 발행부수 1, <우에스트 프랑스>의 본사는 서부 거점 도시인 렌느(Rennes)에 위치하고, 전체 5위이자 지역 신문 중 2위인 <쉬드 우에스트>는 남서부에 있는 포도주의 도시 보르도(Bordeaux)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 그 뒤를 잇는 곳이 파리의 <르파리지앵(Le Parisien)>이다. 전체 순위는 6위인데, 4위를 차지한 스포츠 전문지 <레퀴프(L’Equipe)>도 같은 그룹이어서 그 영향력이 적다 할 수 없다.

파리면 전세계가 다 아는 프랑스의 수도인데 웬 지역 언론이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파리도 프랑스 여러 지역 중 하나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어서 파리에서 발행하는 지역 언론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한국의 경우 수도권의 지역 신문은 주로 서울을 벗어난 경기도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수도에 본사를 둔 지역 신문의 형태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르파리지앵>은 수도권 내 9개 지역에서 지역특별판을 따로 발행하기에 형식적으로 지역 언론이 맞다. 신문에 파리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나 지역 소식이 주로 실리는 걸 보면 내용적으로도 그렇다.

<르파리지앵>도 다른 지역의 주요 일간지들과 마찬가지로 1944년 즉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에 문을 열었다. 822<르파리지앵리베레>라는 제호로 창간호를 냈는데, 머릿기사의 제목은 파리의 승리가 진격하는 중이었다. 신문이 첫 발행되고 사흘 후 파리가 해방됐다. <르파리지앵>의 전신은 1876년 창간해 70년 남짓 운영되면서 프랑스 4대 일간지 중 하나로 꼽히던 <르프티파리지앵>이다.

<르프티파리지앵>은 제3공화국(1870~1940) 체제 하에서 승승가도를 달리며 영향력을 키웠다. 창간 초기에는 주로 반권위주의 즉 좌익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해,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발행부수가 200만을 넘어설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논조가 보수적으로 바뀌었고,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나치에 부역하는 바람에 파리 해방과 함께 폐간을 면치 못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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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영화를 누렸으나 변질돼버린 <르프티파리지앵>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낚아챈 이는 레지스탕스 언론인 에밀리앙 아모리(1909~1977)였다. 자수성가형인 아모리는 논쟁적 인물이다. 그는 60대 후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입은 뒤 사망했는데 이 일에 대한 언론의 반응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좌파 언론 <리베라시옹>아모리의 말이 사고로부터 무사히 탈출했다고 비꼬았다. 아모리라는 사고뭉치가 사라졌으니 그의 말은 이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또 이 신문은 그의 평소 언론관은 정보는 정확해서는 안 되고, 엄청나야 한다였다며 조롱했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앱도>비열한 작자가 죽었다고 적었다.

 

별볼일 없는 집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아모리는 10대 시절 자전거 심부름꾼으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군복무를 마친 뒤 국회의원이던 언론인 마르크 상니에(1873~1950)의 비서로 활동했고 20대 초반 홍보사무소를 차리면서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인쇄소 등을 운영하던 그는 전쟁이 벌어지자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도와 간행물의 인쇄를 도맡았다. 드골 장군의 격문이나 각종 지하 매체의 발행뿐 아니라 레지스탕스 활동가를 위한 신분증과 정부 문서 위조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그가 <르프티파리지앵>을 접수하고 해방된 파리에서 새로운 신문을 만든다고 했을 때 반대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야심이 있는 사업가였다. 아모리는 1946년 스포츠 전문지 <레퀴프>를 운영하던 옛 동료에게 제안을 해 사이클 대회를 개최한다. ‘투르 드 프랑스라는 이름의 대회는 이제는 레전드가 됐다. 20년 이후인 1965년 그는 <레퀴프>를 결국 인수하고 투르 드 프랑스의 소유권을 50%에서 100%로 늘렸다.

주간지 <롭스>(L’Obs)에 따르면 <르파리지앵>은 뮌헨 올림픽 인질사건이 벌어진 19729이스라엘인 인질 10명이 공항을 통해 무사히 탈출했다는 내용의 오보를 내고도 정정보도를 하기보다는 프랑스의 메달 소식을 더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언론의 사명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또한 아모리는 인쇄 노조에 대해 강압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극한의 대립 양상을 빚어냈다. 노조의 파업으로 3개월 동안 신문 발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는 결국 사세가 크게 줄어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르파리지앵>1970년대 하루 70만부 가까이 발행하기도 했다. 아모리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신문은 자식들에게 세습되는 과정에서 송사를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사세가 위축됐다.

아모리는 명과 암이 분명한 인물이다.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힘을 보탰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굴지의 신문사를 차릴 수 있었다. <르몽드><르피가로>와 같은 권위는 없었지만 대중적 콘텐츠로 파리지앵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레퀴프>를 사들이고, 여성 잡지 <마리 프랑스>를 창간하고 매년 투르 드 프랑스를 개최하는 등 그의 사업은 탄탄대로로 보였다. 적어도 매출로만 따지면 좌우를 대표하는 두 권위지에 뒤쳐질 게 없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그는 야심찬 사업가였을지언정 진정한 언론인의 대우는 받지 못했다. 그의 죽음마저 조롱한 동료 언론인들의 반응이 많은 걸 시사한다. <르파리지앵>의 사정은 갈수록 악화해 한때 연간 2천만 유로의 정부 보조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내리막을 걸었다.

미디어와 스포츠를 전문으로 집중하던 아모리 그룹은 결국 미디어 분야를 포기하고 스포츠 사업에만 집중해야 했다. 숨이 멎을 듯하던 <르파리지앵>을 살린 것은 럭셔리 브랜드 루이뷔통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억만장자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었다. 아르노 회장이 이끄는 LVMH 그룹은 2015<르파리지앵>을 인수해 2007100년 전통의 경제전문지 <레제코>를 사들이면서 뛰어든 미디어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었다. ‘레제코-르파리지앵미디어 그룹은 이후 클래식 음악 전문채널인 <라디오 클래식>, 문화 전문 TV<메디치 TV> 등을 인수 합병해 사세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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